> 카츠시카 호쿠사이

카츠시카 호쿠사이

카츠시카 호쿠사이(가쓰시카 호쿠사이, 카츠시카 호쿠사이, 호력 10년 9월 23일 <1760년 10월 31일>? - 카나가 2년 4월 18일 <1849년 5월 10일>) 에도 시대 후기의 우키요 에이샤. 화정문화를 대표하는 한 사람.

대표작에 '후야삼십육경'이나 '호쿠사이 만화'가 있어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화가이다. 모리라 만상을 그려 평생 3만점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어린 시절부터 의욕적이며 판화 외에 육필 우키요에에도 그의 탁월한 묘사력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독본(요미혼)·삽화 예술에 신기축을 발견한 것나, 「호쿠사이 만화」를 비롯한 그림책을 다수 발표한 것, 모필에 의한 형태 묘출에 민완을 분명한 것 등은, 회화 기술의 보급과 서민교육에도 유익한 곳이었다. 카츠시카파의 조가 되고, 후에는, 핀센트·판·고흐 등의 인상파 화단의 예술가를 시작해, 공예가나 음악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시볼트 사건에서는 적발될 것 같았지만, 가와하라 케이가가 대체되어 어려움을 피하고 있다. 온갖 모든 것을 그려내려고 한 호쿠사이는, 만년, 동판화나 유리 그림도 연구, 시도한 것 같다. 또 유화에 대해서도 관심이 강했지만 긴 그 생애에서도 결국 완수하지 못했다. 1999년에는 미국 잡지인 '라이프'의 기획 '이 1000년에서 가장 중요한 공적을 남긴 세계 인물 100명'으로 일본인으로서 유일하게 86위에 랭크했다. 문인의 수는 매우 많아 손자를 포함해 200명에 가깝다고 한다.

그는 평생 30회로 자주 개호하고 있었다. 사용한 호는 「카츠카와 하루로」 「군마정」 「호쿠사이」 「타카야 무네리」 「가후」 「다쓰사이」 「다쓰마사(토키사)」 「백금」 「뢰토」 「도토」 불염거, 니시키부쿠로사, 가이치, 화광인, 쿠노모노, 뇌진, 화광노인, 텐구도 열철, 가쿠리안 매화, 월치로인,卍」「是和斎」「三浦屋八右衛門」「百姓八右衛門」「土地仁三郎」「魚仏」「天山甲」등과 그 조합이다. 호쿠사이 연구가의 야스다 고조는 호쿠사이의 호를 주·부로 나누어, 「춘로」 「종리」 「호쿠사이」 「화광인」등은 부차적인 호로, 수는 많지만 개명에는 맞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만일 이 설이 맞다고 해도, 주된 호를 5도도 바꾸고 있는 것은 역시 많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널리 알려진 「호쿠사이」는, 당초 명승하고 있던 「호쿠사이 타츠마사」의 약칭으로, 이것은 북극성 및 호쿠토 칠성을 신격화한 니치렌 종계의 호쿠 다쓰 묘 보리 신앙 (야나기시마 법성사) 따로 따랐다. 그 외에 비해 이 이름이 통용하고 있는 것은 「호쿠사이 재개위일」 혹은 「호쿠사이 개조 대두」등이라는 형태로 사용되고 있었던 것에 의한다. 덧붙여 그의 개호의 많음에 대해서는, 제자에게 호를 양보하는 것을 수입의 한 수단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설이나, 호쿠사이의 자기 晦(토카이) 버릇이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는 설도 있다 . 덧붙여서, 「호쿠사이」의 호마저 제자의 스즈키 모, 혹은 하시모토 쇼베에에게 양보하고 있다.

호쿠사이는 93회에 오르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거의 많음도 유명하다. 하루에 3번 이사한 적도 있다고 한다. 75세 때는 이미 56회에 달했던 것 같다. 당시의 인명록 '광익 제가 인명록' 부록에서는 텐포 7·13년판 모두 '거소 부정'이라고 적혀 있으며, 이는 주소가 부족한 한 명을 제외하면 473명 중 호쿠사이 단 하나이다. 호쿠사이가 전거를 반복한 것은, 그 자신과, 이연해 아버지에게 돌아온 딸의 사카에(카츠시카 응위)가, 그림을 그리는 것에만 집중해, 방이 거칠거나 더러움 때마다 이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호쿠사이는 평생 백회 이사를 목표로 한 백암이라는 인물을 모방하고 자신도 백회 이사한 후 죽고 싶다고 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호쿠사이의 93회는 극단적으로 해도 에도의 서민은 빈번하게 이사한 것 같고, 쓰즈키 키요카타는 “수국화사 수필”에 있어서, 자신의 어머니를 예로 내 자신도 30회 이상 이사했다고, 도쿄인의 이사 좋아하는 것을 회상하고 있다. 덧붙여 메이지의 우키요에사 토요하라 국주는 호쿠사이에 대항해 평생 117회 이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93번째의 이사로 이전에 살고 있던 차용자에 입주했을 때, 방이 인출했을 때와 아무리 변하지 않고 흩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경계로 전거 생활은 그만두었다 라는 것이다.

우키요에 이외에도 이른바 삽화화가로서도 활약했다. 황표지나 세련책·독본 등 수많은 희작의 삽화를 다루었지만, 작가가 제시한 밑그림대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작자와 충돌을 반복하고 있었다. 수많은 호의 하나 「카츠시카 호쿠사이」를 자칭하고 있던 것은 희작자의 곡정마 코토와 콤비를 짜 한 한때로, 그 사이에 「신편 미즈키 화전」 「근세 괴담 서야 야노세이」 등의 작품을 발표하고, 마금과 함께 그 이름을 일약 부동의 것으로 했다. 독서의 덤 정도의 취급으로 밖에 없었던 삽화의 평가를 현격히 끌어 올린 인물이라고 한다. 덧붙여 호쿠사이는 일시기, 마금택에 거후(이소로)하고 있었던 적이 있다.

가영 2년 4월 18일 호쿠사이는 졸수(90세)에서 임종을 맞았다. 그 때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즉 “죽음을 눈앞에 둔 (호쿠사이) 쿳은 크게 숨을 쉬고 “하늘이 내 목숨을 앞으로 10년 늘려주면”라고 말하고, 잠시 후 더 말하기에는 『하늘이 나의 생명을 앞으로 5년 유지해주면, 나는 진짜 그림 그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죽었다.」

사세의 구는,

「인혼이 되어 여름의 들판에서도 산만하게 나가자」라고 하는 것이었다.

카츠시카 호쿠사이는 평생에 2번 결혼하고, 각각의 아내와의 사이에 1남 2녀를 마련하고 있다(합치면 2남 4녀).

요리는 사거나 받고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 선술집 옆에 살았을 때는, 3식 모두 가게에서 출전시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집에 식기 하나 없고, 그릇으로 옮길 수도 없다. 포장의 대나무 가죽이나 상자에 넣은 채 먹고는 쓰레기를 그대로 방치했다. 토병과 찻잔 2, 3은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 차를 넣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넣어야 한다고 여겨진 여성인 딸의 영(카츠시카 응위)도 넣지 않는다. 손님이 있으면 옆의 소승을 불러, 토병을 건네주고 「차」라고만 좋고, 소승에 넣게 해 손님에게 냈다.

여기까지 흐트러진 생활을 보내면서도 그가 장수였던 이유로서, 그가 콰이를 매일 먹고 있었기 때문에, 라고 하는 설이 있다.

사이토 츠키사카에 따르면, 이 부모와 자식(호쿠사이와 사카에)은 생어를 받으면 조리가 번거롭기 때문에 타인에게 준다고 한다.

호쿠사이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이를 부정하는 의견으로서 “통상의 명가, 문인 묵객으로 마시지 않는 곳은 없다. 또 큰 화가이며 화공료는 많다. 하고 있는, 이사가 많다고 하는 것은 흔히 술 마시기의 전형이다”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메이지에 행해진 주변에의 인터뷰에서는 시모토였다는 것뿐이다. 가나베 효사이에 의하면 「술을 마시지 않을 뿐 아니라, 차에서도 상등의 차는 졸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는다. 특히 연기가 싫어 여름에 모기도 사용하지 않는다」. 또 다른 증언에서는 "술은 마시지 않지만, 과자를 맛본다. 방문할 때 오후쿠모치 7, 8을 가져가자 기뻐하며 혀를 쳤다."고 한다. 교류가 있던 야나기테이 씨는 “술은 맛있지 않지만 차를 먹는다”는 글을 남기고 있다.

호쿠사이는 금전에 무관착했다. 호쿠사이의 화공료는 김일분과 통상의 배를 얻고 있었지만, 적빈으로 의복에도 불편하다. 그러나 금을 저장할 생각은 보이지 않는다. 화공료가 보내져도 포장을 풀지 않고, 세지 않고 책상에 방치해 둔다. 쌀집, 장작가가 청구에 오면 싸서 그대로 던져 건네주었다. 가게는 의외의 금액이라면 착복하고, 적으면 촉구한다는 형태였다. 이런 끔찍한 금전의 취급이 가난함의 원인이 될 것이다.

호쿠사이는 행의작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매우 어색한 대답이나 태도를 취하는 인물이었다. 사람을 만나도 일례도 한 적이 없고, 단지 '안녕하세요', '아니요'라고만 대답해, 일반적인 시후·건강에 대해서 장화를 하지 않았다.

옷은 실크나 유행의 옷을 입은 적이 없다. 잡잡한 손으로 짠 푸른 줄무늬 목면, 감색 소매 없음 반천. 육척의 천칭봉을 지팡이로 해, 짚이나 마리의 초신을 박는다. 누군가로부터 「시골자다」라고 말해지는 것을, 몰래 기뻐하고 있었다. 또, 걸을 때 항상 주문을 주창하고 있기 때문에, 지인을 만나도 눈치채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어느 날에는 호쿠사이가 방의 구석을 붓으로 가리키고 딸을 불러 "어제의 밤까지 여기에 거미줄이 있었을 것이다. 왜 사라졌어. 너 몰라?" 라고 잠시 신경 쓰고 있었던 적이 있었다.

또 방문한 사람의 증언에서는 "호쿠사이는 더러운 옷으로 책상으로 향해, 근처에 음식의 싸움이 흩어져 있다. 딸도 그 쓰레기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라고 한다.

만년의 호쿠사이가 제자 노목 위이치에게 말하고 있다. “9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는 코타츠에는 계속해서, 어떤 사람이 방문하려 해도 그림을 쓸 때도, 코타츠를 나오지 않고, 피곤하면 옆의 베개로 자고 눈을 뜨면 그림을 계속 그린다. 이것을 계속했다.밤복의 소매는 쓸데 없기 때문에 입지 않는다.코타츠에 계속 들어가면 숯불은 올라가기 때문에 숯을 사용한다.이불에는 시라미가 대발생했다」(아래 그림중의 문장과 거의 같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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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쿠사이 가택지 그림(노목 위일 국립 국회 도서관 소장) 제자가 호쿠사이 가택지 그림에 호쿠사이의 모습과 실내의 상황을 그리고 있다. 만년의 호쿠사이가, 코타츠의 이불을 쓰면서 다다미 위에 종이를 깔아 그림을 그리고 있다. 부적절한 얼굴을 한 딸의 사카에가, 방화 냄비에 곁들여 그 모습을 핥고 있다. 스기도에는 '화장 부채면 주머니'라고 종이를 하고 있다. 기둥에는 미칸 상자를 박아 불단으로 하고 있다. 깔끔한 짚신과 나막신. 화분의 뒤가 숯과 식품 용기였던 바구니와 대나무 가죽 쓰레기의 산이다.

"화사는 에도의 명물"이라고 할 정도로 에도는 화재가 많았지만, 호쿠사이는 수십회로 이사를 반복하면서, 전거 56회, 75세가 될 때까지 기적적으로 화재에 당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랑으로 진화의 꼬리표를 그려 사람에게 건네기도 하고 있었다.

75세에 드디어 화재를 당했고, 원래 부족했던 가재도 잃어버린 부랑자처럼 되어 버렸다. 어린 시절부터 그려 모은 자료도 소실되어 힘들어서 더 이상 모이지 않게 되었다. 화재 직후에는 도구가 없는 동안 덕리를 깨고 바닥을 붓고, 파편을 팔레트로 하여 그림을 그렸던 적도 있었다.

이 화재 때 일하는 호쿠사이는 붓을 잡은 채 튀어나와 딸을 위해서도 튀어나와 도망쳤다. 나중에 생각하자 가재를 운반할 여유는 있었지만, 그 때는 붐비고 있어 몰랐다.

나가사키 상관장(카피탄)이 에도 참부 때(1826년), 호쿠사이에 일본인 남녀의 일생을 그린 그림, 2권을 150금으로 의뢰했다. 그리고 수행의 의사 시볼트도 같은 2권 150금으로 의뢰했다. 호쿠사이는 승낙해 며칠간에 마무리 그들의 여관에 납입하러 갔다. 상관장은 계약대로 150금을 지불받았지만, 시볼트 쪽은 “상관장과 달리 박급이며, 똑같이는 사례할 수 없다. 호쿠사이는 "왜 먼저 말하지 않는가. 같은 그림에서도 채색을 바꾸어 75금으로도 마무리됐다."라고 조금 분노했다. 시볼트는 "그렇다면 1권을 사겠다"고 하면 통상의 그림자라면 그걸로 납부하는 곳이지만, 격빈에도 불구하고 호쿠사이는 분개하고 2권 모두 가져왔다. 당시 함께 살고 있던 아내도, "단정하게 묘사하겠지만, 이 모티브의 그림으로는 곧 팔 수 없다. 손해라고 알고도 팔지 않으면, 또 빈고를 거듭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라고 맹세했다. 호쿠사이는 잠시 잠시 멈추었지만 “자신도 곤궁함을 알고 있다. 그러면 자신의 손실은 가벼워질 것이다. "라고 대답했다.

통역관이 이를 듣고 상관장에게 전했더니, 부끄러워서 즉시 추가 150금을 지불하고 2권을 받았다. 이 후 나가사키로부터 년에 수 100장의 의뢰가 있어 본국에 수출되었다. 시볼트는 귀국하기 직전에 국내 정보를 누설시킨 것으로 드러났으며 호쿠사이에도 추궁이 이뤄졌다. (시볼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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